다량의 민구와 민속품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반석은 외암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로 반석이 개천 바닥에 깔려있고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겨두었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마을로 들어서 왼편으로 가면 상류층과 중류층 그리고 서민층의 가옥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덕이], [야인시대] 영화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전통결혼식 모습을 보여주고 옛날 놀이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놀이기구를 배치한 놀거리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외암 이간의 묘소는 외암마을의 서쪽 100여m떨어진 구릉에 서향으로 자리잡고있다. 외암 이간은 1727년 윤 3월 14일에 별세하였고, 그 해 5월에 온양군 유곡에 장례를 치렀다가, 1961년 3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소주위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
'외암'이라는 마을 명칭을 외암리의 서쪽에 있는 역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 역말에는 조선초기부터 이미 '시흥역'이 있었고, 외암마을은 이 시흥역의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라서, '오양골'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농촌체험 민박을 통해 외암민속마을을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외암리 민속마을에는 마을 입구의 장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 초가지붕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있는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고 그외 기와집은 10여 채가 되는데 대개 100년~200년씩 되는 집들이다.
그 때문에 1988년 정부에서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로 전국에서 두번째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1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 보존중이다.
건재고택(영암군수댁)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군수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대조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상익의 고손 이준경 씨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건재(建齎)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의 호이다.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참판댁(큰댁)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이라 '참판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종비인 명성황후의 이모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집이라,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송화댁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 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사 초은(樵殷)이며 순조 10년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동편에 중문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건물과 건물사이가 조금씩 떨어진 튼 'ㅁ'자 집을 하고 있다.
교수댁
이 집은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에 'ㅡ'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ㅁ'자 집이다.
병사댁,신창댁
이 집은 홍경래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다.
이용현은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외암리에서 병사댁 택호는 없어졌다.
참봉댁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건재고택
길 자체 만으로도 아름다운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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